중국대륙의 축소판 타이완 (33회)
'까오슝'과 타이완 불교의 총본산 '불광사'
위드타임즈 기사입력  2021/09/22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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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묘를 나온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까오슝(高雄)을 향해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하였고, 약 2시간 후에 타이완의 최대 항구도시 까오슝에 도착하니 벌써 저녁밥을 먹어야 할 만큼 늦은 시간이었다.

 

​나에게는 이미 낯익은 식당 모습이지만 식당 이곳 저곳에 진열되어 있는 장식품들에게서 중국인들 특유의 재물숭상(財物崇尙)이 드러나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사찰에 가서도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는 것이 첫째라는데, 중국인들은 돈 많이 벌게 해달라는 것이 첫째인 것이다. 오죽 했으면 인사말도 돈 많이 벌자는 ‘꽁시파차이’를 많이 쓰겠는가.

 

 

▲ 타이완 식당에 진열되어 있는 장식품 [사진 제공= 오수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남쪽 항구도시의 야시장 풍경을 보기 위해 타이완에서 가장 인기있는 야시장이라는 ‘류허야시장(六合夜市)으로 향하는데 김형수 교수가 같은 대학의 선배교수로 가족이 타이베이에 살고 있는 김진호 교수님이 우리를 만나려고 타이베이에서 고속열차로 까오슝까지 내려왔다고 알려 준다.

 

​겨울방학을 가족들과 함께 타이베이에서 보내고 있기 때문에 “타이완에 오면 꼭 영접하겠다.”는 메시지를 받은 바는 있지만 타이베이에서 까오슝까지 일부러 내려와 과일 몇 박스를 선물하고 다시 올라가다니 정말 감동이다.

 

 

▲ 까오슝 거리의 모습 [사진 제공=오수열])

 

 

저녁식사를 마치고 남쪽 항구도시의 야시장 풍경을 보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야시장이야 모두가 비슷하겠지 했는데, 역시 까오슝은 북부지역과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는 것이 여기에서도 느껴졌다. 항구 특유의 억셈이라고 할까. 자유 분망함이 있어 보였다.

 

 

▲ 숙소에서 바라 본 까오슝의 야경 [사진 제공= 오수열 ]

 

 

1월 22일(월) 까오슝은 인구 약 200만의 타이완 제2의 도시이자 최대항구이며 동시에 제일의 공업도시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곳에 대한 나의 첫 번째 이미지는 여기가 ‘타이완 민주화’를 이끈 야당도시라는 것이다

 

 

▲ 검은 모래로 유명한 까오슝 해변가 [사진 제공= 오수열]

 

 

1980년대 내가 이 나라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까지만 하여도 타이완은 장징궈(蔣經國)가 집권하던 때로 그의 부친에 비교해서는 매우 친서민적이었고 상당히 부드러웠지만, 여전히 ‘국민당독재’가 실행되었다.

 

 

▲ 장징꿔, 장제스 총통의 장남 [사진 제공= 오수열]

 

 

사실 장제스 총통의 집권기는 ‘2·28사건’의 여파로 1949년 5월 선포된 계엄령이 지속된 시기로, 이 계엄령은 1975년 4월 장제스 총통의 사망 이후에도 상당기간 지속되다가 장징궈가 사망하기 직전인 1987년 7월에야 해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륙에서 건너온 래도인(來島人)들이 많이 거주하는 타이베이를 비롯한 북부지역과는 달리 타이완 본토박이들(本省人이라 부름)이 대다수를 이루는 까오슝을 비롯한 남부지역에서는 국민당의 장기집권에 반대하고 ‘타이완인에 의한 타이완의 정치’를 주장하며 똘똘 뭉쳐가고 있었다.

 

이른바 ‘타이완 민주화’의 구심점이 이곳 까오슝이었다. 여기에서 야당인 민주진보당(民主進步黨) 즉, 민진당이 등장했고 까오슝 시장(市長)은 거의 민진당의 몫이 되어가고 있었다.

 

 

▲ 천수이볜, 최초의 야당 출신 총통 [사진 제공= 오수열]

 

 

이러한 과정을 거쳐 2000년 3월 제10대 총통선거에서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이 국민당의 롄잔(連戰)을 꺾고 당선됨으로써 50여 년에 걸친 국민당 장기집권이 막을 내렸다.

 

그러나 타이완인들의 여망 속에 등장한 천수이볜 정권이 부패스캔들에 휘말렸고, 정권은 다시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에 넘어갔다.

 

물론 마잉주의 집권 8년동안 밀접해진 대륙과의 경제·무역 관계 속에서 대만경제가 대륙에 예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실업자가 크게 증가하여 정권은 다시 민진당의 차이잉원(蔡英文)에게로 교체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 차이잉원_ 최초 여성 총통 [사진 제공= 오수열]  

 

 

물론 까오슝 방문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한국 민주화의 성지 광주, 더욱이 5·18민주화운동을 현장에서 경험했던 정치학 교수인 나로서 어찌 감흥이 없겠는가.

 

까오슝에서 첫 일정은 불광사(佛光寺)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언론을 통해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진 성운대사(星雲大師)가 1967년 세운 절이라고 하니, 천년고찰이 즐비한 우리나라 절에 비교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 까오슝 불광사의 본관 모습  [사진 제공= 오수열]

 

 

그럼에도 타이완 불교의 총본산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각지에 200여개의 분사(分寺)가 있고, 포교조직인 국제불광회(國際佛光會)의 지회가 170개나 된다고 하니 세력 면에서는 대단하다고 하겠다.

 

 

▲ 까오슝 불광사의 랜드마크 대불상 앞에서 (1986년) [사진 제공= 오수열]



우선 절의 크기가 우리를 압도한다. 경내를 한 바퀴 도는데 한국사찰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끼는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저기에 상업적 분위기가 지나치게 풍겨 나온다.

 

 

 

▲ 유학생 탐방단들과 기념촬영 (1986년) [사진제공= 오수열]

 

 

35년 전 타이완 교육부에서 외국인 장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연수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곳을 방문 했을 때와도 너무도 달라진 분위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때는 다소 한적하고 소박한 맛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 때 탐방단의 일원으로 함께했던 외국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새삼 그리워진다.

 

 

▲ 까오슝의 불타기념관 (사진 제공= 오수열)

 

 

불광사 입구쪽에 불타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는데 불타기념관’ 역시 매한가지였다. 입구에 놓인 거대한 코끼리상과 사자상에서도 예술성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

 

뿐만 아니라 코끼리는 인도에서도 신성시하는 동물로 치니 그런대로 이해가 되지만, 맹수 중의 맹수인 사자가 그곳에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북방불교와 남방불교의 차이가 여기에서도 나타난다고 해야 하겠다.

 

 

▲ 까오슝 불타가념관의 관음보살상 (사진 제공= 오수열) 

 

 

▲ 까오슝 불타기념관 로비의 목각 불상 (사진 제공= 오수열)

 

 

 

 

  * 이 글은 오수열 교수의 네이버 블로그에서도 볼 수도 있습니다. 

 

 

▲ 오수열 학장    

* 이 글을 쓴 오수열 교수는 조선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타이완국립정치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중국인민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를 취득했다조선대학교에서 사회과학대학장기획실장정책대학원장 등을 역임한 후 정년 퇴임하였으며 현재는 조선대학교 명예교수와 광주유학대학 학장, ()21세기남도포럼 이사장한국동북아학회 이사장 등을 맡아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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