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크로 둘러보는 일본 견문록(25회)
일본 고텐바 시(市)에서 만난 고향 친구/ 이정재 박사
위드타임즈 기사입력  2022/01/05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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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군 민주지산(岷周之山)  [사진 제공:이정재]



나의 고향은 충청북도 영동군의 어느 산골마을이다. 산골 중의 산골인 두메산골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산뿐이요, 뚫린 곳이라고는 머리 위 푸른 하늘 밖에 없는 두메산골이 나의 고향이다.

 

나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초중고를 이곳 두메산골에서 다녔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낯설고 물설은 도시로 올라와 객지생활을 하였다.

 

‘벙어리 맹탕 같은 산과 하늘이 지겨워 언제나 이 지긋지긋한 두메산골을 벗어나 사람 북적이고 재미나고 신나는 일이 가득할 것 같은 도시 생활을 할 수 있을까’를 늘 꿈꾸며 살았다.

 

그러나 고향을 떠난 얼마 후부터는 고향생각이 간절하였다. 고달프고 힘든 객지 생활을 할 때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고향의 산과 하늘이었다. 저 싫다고 떠난 나를 언제든 아무 싫은 내색 없이 반겨주고 품어주는 고향의 산과 하늘이 그렇게 편안하고 포근할 수가 없었다.

 

이런 산골마을에서 함께 나고 자란 고향 동무는 어떠하겠는가. 고향의 산이나 하늘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 시절을 고향에서 함께 보낸다는 것은 어쩌면 가족으로 지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한집에서 나고 자란 형제처럼 한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하며 성장하는 ‘세상의 형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을 함께한 고향의 동무를 객지에서 만나는 일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만난다면 더더욱 반갑고 기쁜 일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고향 친구를 이번 일본 여행 중에 만나게 되었다.

 

고향 친구의 가족은 친구가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후에 도시로 이사를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먹고 살기 힘든 농촌의 생활을 청산하고, 그래도 먹고 살기가 낫다는 도시로 이사하던 많은 이농 가족의 하나였던 것이다. 고향 친구의 가족이 이사한 곳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인천이었다.

 

나도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재수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객지에 나가 있던 가족들이 있었지만 다들 살기가 변변치 않아 찾아갈 형편도 아니었고, 또 그런 가족들에게 신세를 지는 상황이 너무도 싫어 내가 거처를 마련한 곳이 신문보급소였다.

 

그 신문보급소에서 먹고 자고 신문 돌리면서 어렵게 공부하여 인천에 있는 모 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당시 나는 대학 생활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에 빠지는 일도 많았고, 공부에도 별 관심이 없었으며 이런저런 일들로 대학생활은 힘들고 고단했다. 일종의 대학부적응학생이었던 것이다.

 

객지 생활이 힘들어지는 만큼 고향이 자주 생각났고, 고향의 사람들이 그리워졌으며, 고향의 산과 하늘이 보고 싶었다. 이때 나는 같은 인천에 살고 있는 이 고향친구를 자주 만나 어울렸다.

 

이 고향 친구는 이런 저런 아르바이트도 하고, 그러다 백수 생활도 하였다. 시간이 되면 내가 살던 달동네 집에 찾아와 며칠씩 묵기도 하였다. 가끔 고향이나 다른 객지에서 친구들이 찾아와서 함께 어울려 먹고 놀았다.

 

그러다 보니 가기 싫은 학교를 며칠씩 빠져 출석수 미달로 인한 ‘학사경고’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다.

 

이렇게 고향을 떠나 타향인 인천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하던 고향 친구가 군대를 간 후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 일본으로 갔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일본으로 떠나기 얼마 전에 만난 여자와 함께 일본으로 가서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고 아예 일본에 눌러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언제고 기회가 되면 이 친구를 꼭 만나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던 중 이번 일본여행길에 친구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일본으로 떠난 후 몇 년 후에 일본에서 전화가 온 적이 있었는데 그 연락처가 남아 있었다. 그 번호로 연락을 하니 다행히 번호가 바뀌지 않고 연락이 닿았다.

 

그 친구는 일본의 고텐바 시(市)라는 곳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고텐바 시에서 멀지 않은 후지산을 둘러보고 코텐바 시에 있는 약속 장소를 향해 달려갔다.

 

 

▲ 나가노 시에서 고텐바 시 가는 길 [사진 제공= 이정재]  



약속 장소는 숙박과 식사, 온천을 함께 할 수 있는 일본 전통의 숙소인 ‘료칸’이었다.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고 나서 30분 정도를 기다리니 드디어 친구가 나타났다. 얼마나 반갑고 또 반갑던지 뭐라 말해야 할지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근 30년 만에 만난 고향 친구였다.

 

고향 친구는 많이 피곤해 보였다. 반가워하는 얼굴에는 웃음과 함께 잔주름과 미처 깍지 못한 수염이 자리하고 있었고, 이발할 때를 한참 놓친 듯한 헝클어진 머리에는 흰머리가 제법 많았으며, 몸과 얼굴은 수척해보였다.

 

 

▲ 일본에서 만난 고향 친구와 함께  [사진 제공:이정재]



머나먼 객지, 그것도 물 건너 타국에 와서 오랜 세월동안 고생을 많이 했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안쓰러운 마음에 속이 쓰렸다.

 

우리는 간단히 서로의 안부를 묻고 친구가 예약해둔 숙소로 들어갔다. 일본의 전통 숙소는 오래되고 낡아보였다. 그러면서도 정갈하고 잘 정돈된 숙소의 내부는 일본 특유의 분위기가 묻어있었다.

 

 

▲ 오늘의 목적지인 고텐바 시의 료칸(일본 전통 숙소) [사진 제공:이정재]

 

 

오밀조밀 섬세하게 배치된 공간의 구조며 옛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일본인의 국민성을 엿볼 수 있었다. 고향 친구는 카운터에서 요금을 계산하고 열쇠를 받았으며 우리는 배정된 방으로 올라가 짐을 풀었다.

 

 

▲ 일본의 전통 숙소, 료칸의 내부 [ 사진 제공:이정재]



그리고는 숙소에 있는 목욕탕에 들어갔다. 목욕탕은 비좁았으며 데워진 물로 인해 수증기가 자욱했다. 탕에는 우리나라의 사우나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른 쑥이며 약초들을 물에 풀어 한약냄새 같은 진한 향이 배어났다.

 

물을 간지가 오래되어서 그런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이지 알 수는 없지만 물은 탁해 보여 몸을 담그기가 영 께름칙했지만 먼저 들어간 친구를 따라 탕에 들어갔다. 장시간의 라이딩으로 인해 피곤했던 몸이 햇살을 받은 눈처럼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목욕탕에서 나와 숙소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메뉴판을 보니 반갑게도 우리나라의 숯불갈비가 있었다. 우리는 그 메뉴를 주문하였다. 잠시 후에 음식이 나왔는데 쌀밥이며 된장국, 무엇보다 반가운 김치가 나왔다.

 

 

▲ 일본에서 만나 더욱 반가웠던 김치  [사진 제공:이정재]



우리나라의 여느 식당에서 볼 수 있는 숯불갈비메뉴였다. 석쇠에 고기를 구워 먹으며 그간의 살아온 이야기를 술잔을 주고받으며 나누었다.

 

 

▲ 일본에서 만난 숯불구이 [사진 제공:이정재]



친구는 일본에 와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을 다녔단다. 한동안 그렇게 일과 학업을 병행하다 아이를 갖게 되어 더 이상 학업을 하기 어려웠단다. 남의 나라에서 별다른 기술이나 경제력 없이 살다보니 좋은 직장이나 편한 일을 하기 어려웠단다.

 

그래서 고생을 참 많이 했단다. 그리고 지금은 수산물을 운송하는 일을 하고 있단다. 나를 만나는 오늘 저녁에도 일을 해야 하는데 회사에 사정을 이야기 하고 저녁 시간을 비워 나올 수 있었단다.

 

친구에게는 아들 둘이 있는데 둘째 아이는 일반학교에 다니는 고등학생이고, 큰 애는 어려서부터 축구를 하여 지금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축구팀의 선수로 있다고 했다. 

 

특히 큰 아이 뒷바라지를 하느라 돈도 많이 들고 그러다 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던 것 같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잘 나가는 주전 선수는 아닌 듯하였다.

 

큰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큰 것으로 보였는데 이것은 힘들고 어렵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보상이고 꿈이며 어쩌면 타국에서 힘들게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삶의 탈출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독립을 하면 귀국하여 고향에 돌아와 살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고향에 돌아오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하였다. 고향 사람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우동을 만들어 대접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나에게 우동을 만들어주겠다 하였다. 얼마나 살기가 고단하고 고향 생각이 나면 저런 생각을 하고, 저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왔다.

 

첩첩산중 두메산골을 떠나 낯설고 물설은 객지 생활도 고달프고 서러운데, 바다 건너 타국 땅에서 자식 키우고 뒷바라지 하며 하루 한시도 몸도 마음도 편할 길 없이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아온 고향 동무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밀려왔다.

 

올라오는 삶의 설움과 애환이 넓고 깊은 바다의 파도처럼 밀려들어 주체하기 참으로 어려운 시간이었다.

 

나의 감정을 정리한 '연어의 고향' 자작시이다. 

 

 

 

▲ 함께 뛰어놀던 동무 떠오르니... [ 본문 시 중에서]



 

     [ 연어의 고향 ]

                   

                  이정재 시인 

 

 깊고 깊은 두메산골 냇물에

 연어들 올라와 알을 낳고 씨를 뿌렸네

 

 어린 연어 오랜 잠에서 깨어

 눈을 떠 사방을 둘러봐도

 제 어미를 찾을 길이 없네

 

 몇날 며칠 울다 지쳐 잠이 들고

 배가 고파 물로 배를 채워도

 제 어미를 찾을 길이 없네

 

 보이는 것이라고는

 태산 같은 바윗덩이와 바다 같은 푸른 하늘,

 그리고 나와 같은 어미 없는 동무라

 함께 울고 웃고 놀다 함께 잠이 드는

 어미 없는 내 동무라

 

 함께 이곳저곳 떠돌며 자란 우리

 때가 되니 어른 되어

 각자의 길을 떠나가네

 

 함께 나고 자란 고향 냇가를 떠나

 강을 건너 낯설고 물설은 머나먼 바다로 떠나가네

 

 어느 날, 오랜 옛날 나고 자란 고향 그리워

 다시 길을 떠나 돌아간다네

 

 암흑 같은 깊은 터널 지나 사나운 파도를 헤치며

 길도 없는 고향을 찾아가네

 

 칼날 같은 돌조각에 살이 찢기고

 무쇠 같은 바위에 머리 부딪히며

 바다 같은 푸른 하늘 보이는 내에 다다르니

 이곳이 두메산골 내 고향 산천이라

 

 나를 낳은 내 어미 그리했듯

 나도 알을 낳고 씨를 뿌리니

 내 몸이 녹아내린다네

 

 아스라이 스쳐가는 어린 시절

 함께 뛰어놀던 동무 떠오르니

 너는 나의 형제이고 나의 어미였구나

 

 제 어미 얼굴도 모르고

 함께 뛰어놀고 자라

 같은 곳에 뼈를 묻는,

 내 곁에서 함께 죽어가는

 하늘길동무라.

 

 

▲ 암흑 같은 깊은 터널 지나 사나운 파도를 헤치며...{ 본문 시 중에서]



 

 

▲ 이정재 박사

[ 이정재 박사 프로필]

이정재 박사는 성산효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청소년전공2019년 문학 시선’ 에 상사화아리다’ 외 4편으로 신인문학상 수상과 시인으로 등단하였고같은 해 봄 샘터 문학에 아내의 졸업 외 1편이 당선되어 신인문학상 수상과 수필가로 등단했다.현재 인천지역 초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강화도 교동도의 섬마을 학교에서 겪었던 일들을 소재로 한 소설을 집필 중이다. 2021년 학생들의 글을 모아 우리 학급 온 책 읽기를 펴내었으며 책을 읽고 생각하며 글을 쓰는 활동이 학교 현장에서 실천되기를 꿈꾸고 있다저서로는 아리아자작나무 숲 시가 흐르다’(공저), ‘별을 보며 점을 치다.’(공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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