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泗泚)길에서 백제의 숨결을 느끼다(상)(48회)
백제의 숨결을 찾아서... / 오수열 교수
위드타임즈 기사입력  2022/01/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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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요산회(南道樂山會)의 9월(2015년 9월) 여정을 어디로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 문득 얼마 전 백제문화권 유적이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언론의 보도가 생각나 조규봉 회장에게 제안하였는데 다행히 조회장도 “그거 좋겠습니다.”며 흔쾌히 동의하여 이번달에는 백제문화의 중심지 부여 일원을 걸어 보기로 하였다.

 

​새벽녘까지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중부지방에 5-30mm의 비가 내리겠다는 일기예보를 믿어보기로 하였다. 그 정도면 곳에 따라 오락가락 한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 8시 1차 승차지점인 남도포럼과 2차 승차지점인 동광주 홈플러스에서 승차인원을 점검하니 모두 23명이 동행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고정적 멤버 외에 내가 특별 초대한 대학원 제자 류중령과 바르게살기동구협의회 회원 몇명이 합류한 까닭에 다소 숫자가 늘어난 것이다.

 

▲ 신동엽 시인 생가 [출처=신동엽문학관 홈페이지]  © 오수열

 


부여읍에 도착하니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짜여진 일정대로 먼저 부여읍 중심지에 위치한 신동엽(申東曄) 시인의 생가터를 둘러보기로 하였다.

 

일제시대인 1930년 부여에서 태어나 1969년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신동엽은 일제시대와 자유당독재 그리고 4․19혁명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민족의 전통적 삶과 양심이 파괴되는 과정에서 난무하는 허구성과 허위인식을 날카롭게 시로 표현하였다.

 

우리는 그의 대표시로 꼽히는 「껍데기는 가라」에서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만 남기를 바랐던 시인의 간절한 외침을 느낄 수 있다.

 

이미 타인의 소유가 된 생가를 미망인 인병선 여사가 다시 매입하여 부여군에 기증함으로써 우리들이 그의 문학적 자취를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퍽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화여고 3학년 때 돈암동 사거리에서 헌책방을 경영하던 시인을 만나 결혼후, 서울대학교에서의 학업을 포기하고 시인을 뒷바라지 했고 끝내는 시인의 고향인 부여로 내려온 인병선 여사의 삶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준 러브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신동엽문학관을 나와 궁남지(宮南池)로 행하는 길의 로타리 중앙에 계백장군의 동상이 우리를 맞이하였다.

 

 

▲ 계백장군의 동상  © 오수열



말 위에 올라 전군(全軍)에 돌격을 지시하며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에서 5천 결사대로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맞서 황산벌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루는 장군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비단 로타리 뿐만 아니라 부여의 이곳저곳에는 계백장군의 동상이 서있고 심지어는 그를 기리는 역사유적단지와 계백문이 있을 정도이니, 이곳사람들이 '비운의 장군'을 추모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어떻든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장군이 패배함으로써 삼국정립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한반도는 통일의 계기를 맞았지만 동시에 우리 민족의 대륙을 향한 꿈 또한 시들어야 했고 '반도국가'라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음을 상기할 때 찹찹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 계백로에 있는 계백문  © 오수열

 

 

궁남지는 부여읍의 서북쪽, 부소산(扶蘇山)의 남쪽 들판에 위치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인공 못으로 신라의 안압지보다 40년 전에 만들어 졌다고 한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호수인 궁남지  © 오수열

 

 

호수 주위의 버드나무가 운치를 더해주고, 마지막 꽃잎을 피워내고 있는 연꽃이 우리를 반기는 가운데 김종필씨가 국무총리 시절 쓴 글씨를 각(刻)한 포룡정(抱龍亭)에 올라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니 차속에서의 피로가 말끔히 씻기는 것 같았다.

 

▲ 궁남지의 포룡정 앞에서   © 오수열



김종필 전 총리는 한국정치사에 적지 않는 족적을 남긴 인물로 사람에 따라 상이한 평가가 존재한다.

 

젊은 나이에 5.16 쿠데타의 주역으로 3공화정을 열었지만 박정희의 후계자가 되지 못했고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 후에는 비리혐의자로 몰리기도 하였다.

 

그후 '정치야합'으로 비난 받았던 3당합당을 통해 6공화국 수립에 참여했으며 마침내 'DJP연합'으로 김대중정부 수립에 기여하면서 한 때는 공동정부의 실세총리로 불리기도 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김종필에 대한 부여사람들의 애착이 대단하다는 것은 대선과 총선 때마다 그의 영향력이 적지 않게 작용했으며, 지금의 '충청대망론'도 그에게 뿌리를 두고 있다는 데에서 분명해지고 있다.

 

​궁남지에서 나와 백제왕릉원으로 알려진 능산리 고분군으로 가기 위해서는 아스팔트 시골길을 적지 않게 걸어야만 했다.

 

찬란했던 백제문화를 상징하는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된 곳으로 알려진 이곳에서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가 그려진 무덤이 발굴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을 복원ㆍ전시한 무덤을 들여다 볼 수도 있었다.

 

 

▲ 능산리 고분군 전시관 앞에서  © 오수열



능산리 고분군전시관을 둘러본 다음의 여정지는 전시관이 아닌 실제의 고분군을 보는 것인데, 전시관을 나와 도로를 따라 상당한 거리를 걸어가야만 했다. 아침부터의 강행군에 모두들 힘들어 하는 기색들이 역력한데 저 멀리 거대한 무덤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름하여 「능산리 고분군」인 것이다.

 

 

▲ 능산리 고분군 앞에서  © 오수열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가 부여를 도읍으로 했던 사비시기(泗沘時期) 즉, AD 538년에서 660년 경의 왕릉들이니 백제후기시대의 왕릉이라고 하겠다.

 

고분군을 둘러보는데 한 켠에 고분처럼 크지도 않는데 굉장히 커다란 비석이 놓여진 봉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호기심 많은 내가 다가가 읽어보니 '백제국의자대왕유비'라고 쓰여져 있지 않는가. 얼른 일행을 불러 그 앞에서 기념사진 한장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 의자왕의 가묘(假墓)였던 것이다.

 

 

▲ 의자왕의 가묘 앞에서  © 오수열

 

 

사연인 즉 백제의 마지막 국왕으로 망국의 비운을 맞이했던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패하여 당나라군(軍)의 포로가 되었고, 그들에 끌려 당나라로 압송되어갔고 그곳에서 삶을 마감했다는 것까지는 역사에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게 그가 생(生)을 마감한 곳이 절강성이었고 그곳에 그의 묘가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다. 2000년대 초에 한ㆍ중관계가 많이 좋아짐에 따라 부여 인사들이 중국에 묻혀있는 의자왕의 묘를 찾기 시작하였고, 절강성에 있는 그 묘의 비석표본을 가져와 이곳에 세웠다는 것이다.

 

* 이 글은 오수열 교수의 네이버 블로그에서도 볼 수도 있습니다. 

 

 

 

▲오수열 학장

이 글을 쓴 오수열 교수는 조선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타이완국립정치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중국인민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를 취득했다. 

조선대학교에서 법인사무국장, 사회과학대학장, 기획실장, 사회과학연구원장, 정책대학원장 등을 역임한 후 정년퇴임하였으며 현재는 조선대학교 명예교수로 광주유학대학장, 성균관자문위원, (사)21세기남도포럼 이사장 등을 맡아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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