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여행] 부여 부소산성에서 백제의 역사를 만나다
한상진 기자 기사입력  2022/08/01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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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부소산성 진입로  부소산성 안내 돌비   © 한상진 기자

 

 

부여 부소산성은 백제시대의 성터로 평시에는 왕궁의 후원이었고, 전쟁 때는 도성을 방어하는 성으로 군창지, 낙화암, 고란사, 영일루, 사자루, 삼충사 등이 있다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사비성(泗沘城)’·‘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부소산성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외 위치하고 있으며 문화재 사적 5호로 지정되었다.

 

부소산성은 538년 백제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백제의 도읍지 였으며, 백제의 마지막 왕성 당시에는 사비성이라 불렀다.

 

부소산성은 부소산의 자연 지형을 활용해서 흙으로 쌓은 성곽이다. 군창지와 사자루 의 산봉우리는 머리띠를 두르 듯 쌓은 태뫼식 산성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포곡산성이 혼합되어 축조된 복합식 산성이다.  산성의 면적은 98만 3900㎡, 둘레는 2.200 m로 소나무가 많은 산이다.

  

부소산 북쪽에는 백마강이 감싸 흐르고 있는 천연적인 지세로 외적 방어에 유리하고, 남쪽은 완만한 구릉지가 형성되어 있어 이곳에 산성을 쌓아 도성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대부분 흙으로 다진 토성으로 평상시에는 궁궐의 후원으로 이용되었으며, 전쟁시 도성의 방어기점으로 사용되었다.

 

부소 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泗沘)를 수호하기 위하여 백제 성왕 16년(538)에 수도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이중의 성벽을 쌓았다.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내에는 사비루(泗沘樓)·영일루(迎日樓)·반월루(半月樓)·고란사(皐蘭寺)·낙화암(落花巖)과 사방의 문지(門址), 그리고 군창지(軍倉址) 등이 있다.

 

1978년 금강상수도사업 공사로 인하여 성벽의 단면이 드러났는데, 성벽 내부는 잡석으로 적심석(積心石)을 넣었음이 확인되었고,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목책지(木柵址)와 수혈식(竪穴式)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1981년의 사비성 복원 때 토성의 단면을 자른 결과 대개 아래로부터 A·B·C·D의 4층을 확인하였다. 맨 아래층인 A층은 붉은색의 진흙으로 판축하여 하부를 축조 하였는데, 토층의 높이는 1.9m이며, 토루 바깥면에는 토루를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4단의 석축이 남아 있다.

 

1988년 발굴조사에서는 토기 구연부에 북사(北舍)라는 명문이 출토되었다. 1992년 조사에서는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남쪽 50m 지점에서 백제 시대의 도로유적과 배수시설이 드러났다. 

 

부소산성 축성의 구체적 방법을 보면, 성벽 안쪽의 흙을 파서 호(壕)를 만든 한편, 그 파낸 흙을 내벽에 보축(補築)하였다. 성의 바깥 벽면은 기반토(基盤土)를 마치 판축(板築)하듯이 황색사질토와 적색점질토를 겹겹이 다져놓았고, 그 위에 돌을 3∼5단으로 쌓고 흙을 덮었다.

 

부소산성은 백제시대의 독특한 복합식 산성양식을 하고 있다. 성 안에는 동·서·남문지가 있으며, 북쪽의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북문과 수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문지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대형철제 자물쇠가 발견되어 문지였음을 입증해주고 있으며, 남문지에는 아직도 문주(門柱)를 받쳤던 초석 2개가 동서로 나란히 있다.

 

부소산성은 사비천도 이후 백제 멸망시까지 국도의 중심 산성으로, 인근의 청산성(靑山城)·청마산성(靑馬山城) 등의 보조산성 등과 함께 왕도 방어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부소산성 입구에서 10분 정도 걷다 보면 궁녀 3천여 명이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과 함께 슬픔이 서린 낙화암과 아름다운 백마강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황포돛배를 타고 잔잔하게 흐르는 백마강 따라  백제 역사 숨결을 느낄 수 있다.  

 

▲ 부여 부소산성길 이용안내도 부여군시설관리공단 캡처

 

 

▲ 부여 부소산성 정문 , 왼쪽에는 매표소가 있고 부소산성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 부여 부소산성 정문 옆에 세계 유산 백제 역사 유적지구를 알리는 표석 © 한상진 기자



▲ 부여 부소산성 진입로  부소산성 안내 돌비   © 한상진 기자

 

 

▲ 부여 부소산성 산책로의 안내 표지판  © 한상진 기자



▲ 부여 부소산성의 낙화암 백화정: 백마강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는 낙화암 정상 바위 위에 육각형 지붕으로 세워진 정자. 백제 멸망 당시(660년) 궁녀 3천여명이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 '부풍시사'라는 시모임에서 건립했다. © 한상진 기자

 

 

▲ 부여 부소산성 백화암 전망대에서 관광객들이 백마강을 감상하고 있다. © 한상진 기자

 

 

▲ 부여 부소산성의 고란사: 낙화암에서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궁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지은 사찰로 고란사 뒤 절벽 밑의 고란약수를 한잔 마시면  3년씩 젊어진다는 속설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 한상진 기자

 

 

▲ 부여 부소산성의 낙화암: 백제 의자왕 삼천궁녀들의 원혼을 백마강에 묻었다는 망국의 슬픈 전설을 간직한 바위로 높이는 40m 이다. 붉은색의 낙화암 글씨는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한상진 기자

 

 

▲ 부여 부소산성 고란사 선착장: 고란사에서 구드레 선착장까지 운행한다. ⓒ 한상진 기자

 

 

▲ 부여 부소산성의 황포돛배 : 조선시대 주요 운송수단으로 물자를 수송하였던 배, 지금은 남한강,임진강,백마강 등에서 유람선으로 활용하고  있다. © 한상진 기자



▲ 부여 백마강에서 관광객을 싣고 유람하는 수륙양용버스  © 한상진 기자



▲ 부여 백마강 황포돛배에서 바라본 부소산 전경  © 한상진 기자

 

 

▲ 부여 부소산성 구드레선착장  © 한상진 기자

 

 

▲ 부여 부소산성의 황포돛배 :고란사에서 구드레선착장까지 왕복 소요시간은  약 15분 정도이고 여객운임은 성인 6.000원 소인 2.000원이다.  © 한상진 기자

 

 

▲ 부여 백마강 강변 산책로에 세워진 구드레조각공원   © 한상진 기자



▲ 부여 부소산성 구드레선착장 입구의 관광 종합안내도   © 한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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