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걸어온 길 '분향골 이야기'(14회)
오수열(조선대학교 명예교수·광주유학대학 학장) / 수필가
위드타임즈 기사입력  2023/04/11 [09:02]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분향초등학교 전경  ⓒ분향초등학교 홈피 캡쳐 



나는 남면서초등학교 13회(1962년) 졸업생으로 지금은 조선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부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내가 태어난 마을은 남면에서도 가장 외진 곳인 마령리 내마 마을로 분향리의 면사무소까지 나오는데도 거의 1시간이 걸리는 곳입니다.

 

나는 원래 마령리에서 태어나 4살 때 광주로 이사를 와서 양동초등학교를 다니다가 가정 사정 때문에 5학년 2학기 때 서초등학교로 전학했으니 서초등학교에서의 재학기간은 1년 6개월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고향에서 보낸 1년 6개월간의 초등학교시절은 지금도 나의 뇌리에 너무나 생생하며, 나의 정신적 자양분으로 오늘날 나의 삶의 토대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이미 고향을 떠난지 43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고향의 산천은 때때로 나의 뇌리를 스치고 가끔은 꿈속에서 나타나곤 합니다.

 

​이제 나이 들어 가면서 노후를 고향에서 보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아 한 달 전에는 아내와 함께 마령리를 찾아가 고향 떠날 때 팔려 헐어진 탯자리 집터와 지금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서초등학교에 가보기도 하였습니다.

 

​뜻밖에 1997년 남면서초등학교가 폐교된 이후 내 초등학교 학적부를 관리하는 분향초등학교의 문명주 교장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처음엔 다소 당황스러웠으나, 그 취지의 말씀이 성큼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비록 나의 삶이 고관현직(高官顯職)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한 사람의 학자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걸어온 길이 고향의 후배 또는 모교의 학부모들에게 다소나마 교훈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담담히 지나온 길을 서술할까 합니다.

 

​광주 양동초등학교에서 고향의 남면서 초등학교에 전학한 지 얼마 후 6학년 5월에 발발한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전국 방방곡곡에 일어난 재건 국민운동은 시골 소년·소녀들에게 아침마다 일어나 동네 앞의 안산(案山) 위에 모여 재건 체조를 하게 하였고, 그 뒤에는 손에 빗자루를 들고 동네 청소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사실 당시로써는 매우 어린 나이인 일곱 살에 양동초등학교에 입학했던 나는 서초등학교로 전학하여 가니 동급생 대부분이 나보다 2~3살 심지어는 네 살까지 더 먹은 친구들이 많았으니, 형, 누나들 틈에 끼어 학교에 다닌 셈입니다.

 

​1962년 서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3월에 나는 생활이 괜찮은 다른 친구들이 장성중학교나 임곡중학교 등으로 진학한 것과는 달리 부모님을 따라 영암군 덕진면으로 다시 이사를 가야 했습니다. 마령리보다는 훨씬 평야 지대인 덕진면의 논값이 쌋기 때문에 농토를 늘려가기 위한 생계수단에서 고향을 뜬 셈입니다.

 

​당연히 나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부모님을 도와 새로 구입한 일곱 마지기의 띠밭(황무지)을 개간하는 일에 전념해야 했고 때로는 4km여 떨어진 먼 산으로 솔방울을 따러 가야 했습니다. 솔방울은 다시 영암읍 내의 뻥튀기집에 가져가 팔아야 했으며, 그 돈은 우리 가족의 생계에 적지 않은 보탬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1년을 보낸 후 다음해에도 부모님은 나를 중학교에 보내실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신 것이지요. 몸이 무척이나 건강했던 내가 13살 나이로 지게에 벼 한 가마씩을 지고 3km쯤 떨어진 공판장엘 거뜬히 따라다니는 것이 대견스러워 “이제 우리 집 일꾼 하나 더 생겼다.” 기뻐하셨을 뿐입니다.

 

​그러나 공부하고 싶은 일념이 넘쳤던 나는 뒤늦게 솔방울 푸데를 지고 다닐 때마다 눈에 띄었던 읍내 한쪽의 ‘영암고등공민학교’를 찾게 되었으며 공납금이 1학기에 150원이라는 것을 알고 부모님을 졸라 입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의 3년은 여느 중학교와는 다른 근로와 공부를 병행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공납금이 중학교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보니 선생님들의 수고비(월급이 없는 무료봉사였음)와 분필, 지우개 등의 교구를 근로의 대가에서 얻은 수입금으로 충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흙벽 돌로 지은 교실 바닥은 흙먼지가 푸석거렸고, 겨울에 깨진 유리 창문에서 들어온 냉기는 손을 꽁꽁 얼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그곳에서 공부한 학생들 가운데 은행지점장도 있고, 광주시청 국장도 있고, 제법 규모 있는 회사 사장도 있는가 하면, 나처럼 대학교수도 있는 것을 보면 ‘무언가 이루려는 의지(意志)’가 있을 때 성취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3년 과정을 마친 후 나는 목포 동광고등학교(현:홍일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습니다. 중학과정도 어렵게 마쳤는데 제 돈 내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이러한 만고풍상과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나는 1969년 2월 조선대학교 부속 고등학교 야간을 졸업할 수 있었고, 같은 해 3월 조선대학교 법정대학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하여 대학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아들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부모님 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조대부고 야간을 다니는 동안에는 나는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대학을 다니면서도 양동 복개상가 건축공사장에서 노동을 마다하지 않았고, 대학원을 다니면서도 야간에는 과외수업, 주간에는 하남 무밭에서의 작업 등 노동과 공부를 병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대학원을 마치고 1975년 조선대학교 조교공채시험에 합격하여 지금까지 29년을 같은 대학에서 근무하여 오면서도 나는 평범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1980년 봄 전국에서 일어난 ‘학원민주화운동’에 관련되어 5․18 이후 등장한 신군부 치하에서 대학경영자로부터 핍박을 받기도 하였으며, 마침내는 1982년 2월 말 재임용에서 탈락하여 해직 교수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해직 기간에 4년여를 타이완에 유학하여 국립정치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할 수 있었던 것도 어렸을 때부터 내재화된 불굴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사회가 민주화되어 1988년 3월 대학 강단에 복직한 후 나는 대학의 민주화에 더욱 열과 성을 다하였고 통일문제연구소장, 재단 사무국장, 정책대학원장, 기획실장, 지역사회발전연구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조선대학교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학자의 역할을 연구 및 강의와 함께 사회발전에 대한 기여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이른바 ‘현실 참여형 교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21세기 국제화 시대 속에서 사회와 학문의 발전이 병행할 수밖에 없고 학문이 사회발전을 선도해야 한다는 개인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일찍부터 ‘사회 민주화’에 관심을 가져왔고 각종 사회활동에 참여했습니다. 1990년 초부터 수없이 중국을 방문하여 한․중 관계발전을 위한 분위기 조성에 노력하였습니다.

 

1996년 초에는 「한국동북아학회」를 창립하여 초대회장으로서 지역학문의 발전과 영호남 교류에 앞장섰는가 하면 2000년 3월에는 (사)21세기 남도 포럼을 창립하여 이사장으로서 지역과 국가의 중요관심사에 대해 여론을 공론화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헌법 기구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으로서 통일 및 남북관계에 대해 대통령에게 자문하는가 하면 행정자치부 지방자치단체 합동평가위원으로서 지방자치의 제도화와 광주광역시 선거관리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선거문화 창달에도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연구와 강의를 통해 습득한 지식을 사회에 환원하려는 취지에서 그동안 각급 기관단체의 요청으로 1,000여 회의 특강을 담당하였으며, 수많은 TV 및 라디오 출연과 신문․잡지의 기고를 통하여 나름대로 지역사회와 국가발전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학문에 종사하여 오는 동안 모두 14권의 저서를 출판하였고, 1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는가 하면 틈틈이 지나온 나의 삶과 생각을 수필로 기록하는 작업에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1996년 여름 고향 마령리를 찾았을 때 느낀 소회를 적은 '꼴망태 두고 온 논두렁‘은 문예사조에서 신인상을 수상 함으로써 수필가로 등단하는 기쁨도 누렸습니다.

 

​이번에 나의 초등학교 학적을 관리하는 제2의 모교에서 「분향동산」이라는 문집을 발간한다는 소식과 함께, 글을 요청하였기에 「나의 걸어온 길」을 적어 보냅니다만, 이것이 얼마나 후배들에게 감동으로 다가갈는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다만 이 짧은 글을 통하여, 몇십 년 전 한 개인이 살아왔던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 훗날 하나의 자료로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아무쪼록 「분향동산」이 단 한 번의 일회성 행사로 끝나지 말고 영원히 지속함으로써 고향에 거주하고 있는 분들과 출향민들 간의 가교가 되고 문향(文鄕) 장성의 전통을 드높이는데 이바지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바입니다(2004년 작). 

 

 

▲오수열 학장 © 위드타임즈

[오수열 교수 프로필]

오수열 교수는 조선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타이완국립정치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중국인민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를 취득했다. 

조선대학교에서 법인사무국장, 사회과학대학장, 기획실장, 사회과학연구원장, 정책대학원장 등을 역임한 후 정년퇴임하였으며 현재는 조선대학교 명예교수로 광주유학대학장, 성균관자문위원, (사)21세기남도포럼 이사장 등을 맡아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메일로 보내기인쇄하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위드타임즈
#나의걸어온깅 # 오수열교수 #수필, #나의걸어온깅 # 오수열교수 #수필 관련기사목록

[포토] 일산호수공원 '2024고양국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