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길을 걸으며 ‘폴리페서’들을 생각하다(36회)
선비정신’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오수열 교수
위드타임즈 기사입력  2024/04/1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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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호정 너른 바위 위에서 잠시 몸을 쉬고 있는 필자[ 사진 제공= 오수열]

 

 

남도 요산회의 4월 행선지는 경남 함양군의 ‘선비길’을 걷는 것으로 정하여졌다. 초여름을 방불케 하는 유난히 좋은 날씨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을 나섰는데, 일행들의 차림에서도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광주에서 출발하여 두어 시간을 달린 끝에 하차한 곳은 함양군 서하면 봉전면이었는데, 이곳이 오늘 우리가 걷기로 한 화림동(花林洞) 계곡을 끼고 걷는 이른바 선비길의 시발점임과 동시에 거연정(居然亭)이라는 아름다운 정자가 있는 곳이었다.

‘거연정’이란 자연과 함께 어우러진 정자란 뜻이겠는데, 조선 중기의 선비인 화림재(花林齋) 전시서(全時敍)가 1604년(仁祖 18年)에 억새풀로 지은 정자로, 고종(高宗) 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872년 그의 7대손인 전재학(全在學)이 재건립하였고 1901년 중수된 것이라고 한다.

 

거연정의 특징은 다른 대부분 정자가 경치 좋은 계곡의 가장자리에 있는 것과는 달리 계곡 가운데의 암반 위에 위치하여 마을과의 내왕은 다리(橋)에 의존하여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대신 전후좌우의 계곡 경치를 온전히 즐길 수 있다는 데에 있었다.

 

조규봉 회장의 설명에 의하면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거연정을 출발하여 동호정(東湖亭)을 거쳐 농월정(弄月亭)까지의 총 6.2km로 대략 두 시간쯤 걸릴 것이라고 한다.

 

화림계곡은 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강(南江)의 상류에 해당하고, 그 하류는 진주시(晉州市)에 이르는 곳인데, 이 길을 50여 분을 걸으니 계곡 건너편의 너른 바위 위에 솟아있는 정자가, 곧 동호정(東湖亭)이었다.

 

선조(宣祖) 때 관리로 이곳 태생인 장만리(章萬里)가 임진왜란 때 선조를 등에 업고 의주(義州)까지 피난하여 선조로부터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람’(永世不亡者)이라는 교지를 하사받은 것을 기리기 위해 1890년경 그의 후손들이 건립하였다는 동호정은 1936년 중수(重修)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후손들의 노력 덕인지는 몰라도 장만리는 1891년(高宗 28年)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증직되었으니 ‘선조가 빛나기 위해서는 후손이 잘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허언은 아니라고 하겠다.

 

동호정 너른 바위 위에서 잠시 몸을 쉬고, 다시 길을 걷는데 ‘호성(虎城)마을을’이라는 동네가 나타났다. 마을 이름으로 볼 때, 옛날 이 근처에 호랑이들이 자주 출몰했던 것 같고, 이를 막기 위해 마을 뒤 어딘가에 성(城)을 쌓았던 것이 분명하다.

 

호성마을을 조금 지나니 계곡을 끼고 알맞은 숲이 형성되어 훨씬 걷기가 좋은 ‘트래킹 길’이 나타났고, 주변 경치 또한 훨씬 좋아 우리 모두의 입에서 “참 좋은 곳이다.”라는 감탄들이 쏟아졌다.

 

이 좋은 곳에 딱 어울리는 정자가 다름 아닌 농월정(弄月亭)이었다. 계곡 저 건너에 틀림없이 농월정으로 보이는 정자가 보였지만, 시간이 벌써 오후 1시가 지나있어 우리는 먼저 점심을 먹고 농월정으로 건너가기로 하였다.

 

“자주 참석지 못해 미안하다.”라는 겸손의 말씀과 함께 김순자 회원이 사준 빠가탕의 찰진 맛에 흠뻑 젖어 피곤이 엄습해 왔지만 얼마나 경치가 좋길래 ‘달을 희롱 한다.’라는 뜻의 농월정이라고 했을까 하는 기대감 속에 우리는 농월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과연 화림계곡에서도 가장 넓을 법한 ‘너럭바위’를 앞마당으로 삼아 그 자태를 뽐내고 있는 농월정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조선조 광해군 때 관리로 영창대군의 죽음과 인목대비의 유배가 부당함을 직간하다가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榑)가 경관이 수려한 이곳 너럭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상심을 달랬다는 농월정은 함양에서도 가장 손꼽히는 명승지로, 이곳 일대는 국민 관광지로도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박명부는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예조참판과 강릉 도호부사를 지냈으며 만년에는 국왕이 수차례 관직을 제수하려 했으나 응하지 않고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하니 지족당(知足堂)이라는 호(号)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1899년 현재의 모습으로 중수되었으나 2003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2015년 재건된 탓에 정자 특유의 고즈넉한 정취를 느낄 수 없었지만 대신 선명한 단청을 감상하고 편액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기로 하였다.

 

옛적 선비들은 이처럼 지조와 충절을 선비의 첫째가는 덕목으로 여겼거늘 오늘날 학자들은 왜 이리 권력을 쫓는데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일까.

 

19대 대선을 한 달여 앞둔 시점에서 이 당(黨) 저당, 이 후보, 저 후보를 옮겨 다니며 ‘정책자문단’에 이름을 올리는 등 학자로서의 본분보다는 대선 뒤의 떡고물에 정신 줄을 놓고 있는 ‘폴리페서’들의 퇴행적 모습이 국민에게 얼마나 커다란 실망을 주고 있는가.

 

이름을 올리더라도 최소한 한 명으로 만족해야 할 것 아닌가. 같은 교수의 한 사람으로 부끄러울 뿐이다. 과연 그들 같은 학자들에게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는 지조(志操)와 ‘선비정신’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2017년 작}

 

 *폴리페서: 정치를 뜻하는 '폴리틱스(politics)'와 교수를 뜻하는 '프로페서(professor)'의 합성어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교수를 말한다.

 

 

 

본문이미지▲오수열 학장 ©위드타임즈

[오수열 교수 프로필]

오수열 교수는 조선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타이완국립정치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중국인민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를 취득했다. 

조선대학교에서 법인사무국장, 사회과학대학장, 기획실장, 사회과학연구원장, 정책대학원장 등을 역임한 후 정년퇴임하였으며 현재는 조선대학교 명예교수로 광주유학대학장, 성균관자문위원, (사)21세기남도포럼 이사장 등을 맡아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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