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고향 중국 취푸(曲阜) (24회)
공자님의 직계 후손이 사는 공부(孔府)/ 오수열 교수
위드타임즈 기사입력  2021/07/20 [09:05]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공묘에서 조금 이동하니 공자님의 직계 후손들이 대대로 사는 공부(孔府)가 있다. 면적만도 16만m²에 이르며 방은 463개나 된다고 한다.

 

공자의 종손들은 황제로부터 연성공으로 봉해져 그 지방의 수장 역할을 했으니 공씨 가문의 권세는 대단하였다. 청말(淸末)에 연성공 장모 생일때 서태후가 목숨수(壽)자를 써서 하사한 비석이 있을 정도였다.

 

▲ 담장을 통해 안채로 물을 연결해 주는 구멍  ©오수열

 

 

재미있는 것은 ​1천여 명에 이르렀던 공부의 하인들 중에서 안채에 드나들 수 있었던 사람은 겨우 십여 명에 불과할만큼 남녀유별(男女有別)이 엄격했다는 사실이다.

 

안채로 물을 나르는 물지게꾼도 들어가지 못하고 안채의 담장에 뚫어져 있는 구멍으로 물을 부어야 했다.

 

물이 그 구멍을 통해 안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경사진 물길이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원형이 보존되고 있다.

 

이처럼 영화를 누렸던 공부는 마지막 32대 연성공이 국공투쟁에 패배한 장개석이 대륙에서 대만으로 철수할 때 함께 대만으로 가 버렸기에 지금의 공부는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가 대만의 장개석 정부에서 고시원장(考試院長)을 지낸 꿍더청(孔德成)이고, 따라서 공자님의 직계종손은 현재는 대륙이 아닌 대만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화려한 역사를 뒤로하고 정작 있어야할 주인은 없는 가운데 거대한 유적만 남아 있으니 씁쓸할 뿐이다.

 

 

▲ 공림으로 이동중인 버스 안에서  © 오수열

 

 

정원을 지나 큰 문을 나서니 대로변이다. 잠깐 소형 버스로 이동하여 공씨들의 씨족묘지인 공림(公林) 으로 향한다. 아이스크림 하나씩 입에 물고 더위와 피곤을 녹여본다. 그러나 계속 된 걸음으로 피곤이 쉬 가시지 않는다.

 

다리 아픈 사람은 공림 내를 도는 이동 차량을 이용하기로 하고 나머지는 가이드와 함께 걸어서 공자님 묘로 가기로 했다. 필자는 김학봉 가이드와 함께 걸어서 공자님 묘로 향하였다.

 

 

▲ 공자의 72제자를 상징하는 72그루의 측백나무가 심어진 거리  ©오수열

 

입구에는 공자님 제자 72현을 상징하는 측백나무가 좌우 도로변에 심겨져 있다. 사방 천지가 묘이고 비석이다. 이미 허물어지고 납작해진 묘도 있는가하면 여기저기 너부러져 나무가 자랄 만큼 관리가 안 되는 묘들도 부지기수이다.

 

오늘날에도 공씨 후손들은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면 이곳에 묻힐 수 있다는데 그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공자님께서는 자신의 사상을 배척하는 사람이 후대에 나올 것을 예측하고 자신의 묘를 팔방으로 만들게 하였다고 한다.

 

훗날 7개의 묘를 파헤치고 유골이 나오지 않자 마지막 남은 하나를 파헤치기 위해 수로(水路)를 건너려는 병사들이 이유 없이 모두 주저앉아 버리는 기이한 일이 생겨 이곳은 더 이상 손을 대서는 안 되겠다 싶어 중단 했다고 한다.

 

오래 전의 전해져 오는 말이니 믿거나 말거나 이겠지만, 성인들과 관련되어서는 이러한 말들이 흔히 있지 않는가.

 

 

▲ 공자의 묘소    © 오수열

 

한참을 들어가니 드디어 키 큰 문인석이 보이고 3개의 큰 묘가 앞 뒤 옆으로 누워 있다. 드디어 공자님의 묘소가 눈에 들어왔다.

 

앞의 묘는 손자 자사의 묘이고, 바로 뒤가 공자님의 묘, 그리고 공자님의 왼편이 아들 공리의 묘이다.

 

손자는 앞에 안고 아들 손을 잡고 가는 방식의 묘자리 배치라고 한다. 공자님 앞 비석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 황금빛 한자로 새겨져 있다. 원(元)의 성종 때 추봉 된 것으로 공자님의 공식 존호이다.

 

 

▲ 나라에서 세운 비석 뒤에 가족들이 세운 비석이 보인다.  © 오수열

 

그런데 맨 아래 왕(王)자가 조금 떨어져서 보면 앞 상석에 가려져 간(干)으로 보인다. 참배하는 황제들을 배려해 멀리서 볼 때 왕(王)처럼 안 보이게 하려고 한 획을 가렸다고 하니 중국인들의 자유자재한 기지가 놀라울 뿐이다.

 

민간인 출신으로 추봉된 왕에게 절을 하는 것은 황실의 자존심과 관련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석은 나라에서 내려준 것이고, 그럼 가족들이 세운 비석은 어디 있을까 궁금해 주위를 둘러보니 큰 비석 뒤에 또 다른 비석 하나가 자그맣게 서 있었는데 그것이 가족이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무더운 날씨 속의 옷차림 때문에 예를 갖춘 참배는 할 수 없었지만 잠깐의 목례로 성인에 대한 예의를 갖춘다. 벗은 아니지만 인근 나라에서 성인의 말씀을 좋아하여 함께 글을 배우며 성인을 뵈러 온 후학들을 공자님 또한 반갑게 맞이하시지 않겠는가.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어쩌면 이러한 당부의 말씀도 하실지 모른다.

“弟子 入則孝하고 出則弟하며 謹而信하며 汎愛衆하되 而親仁이니 行有餘力이어든 則以學文이니라.”

 

​맞는 말씀이다. 효도와 우애 등 인륜이 먼저이고, 그러고도 여력이 있거든 학문에 힘써야지, 제 부모형제는 내팽개치고 입신출세를 위해 머리 싸매고 공부하는 요즘 세태가 두렵기까지 하다.

 

공자님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 한 켠에 우람한 측백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고 그 옆에 자공수식해(子貢手植諧)라는 비석이 있었다. 자공이 누구인가? 공자의 제자 중 언어에 뛰어나고 이재(理財)에도 밝아 공문(孔門)의 번영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 바로 자공이다.

 

 

▲ 자공수식해(子貢手植諧)라는 비석  ⓒ 오수열  



공자가 세상을 뜨셨을 때 타국에 있었던 관계로 장례식에 참석치 못한 것을 통탄하여 다른 제자들이 3년 상을 치루고 모두 각자 집으로 돌아간 것과는 달리 공묘 옆에 초막을 짓고 3년을 더 복상(服喪)한 유일한 제자이기도 한데, 그가 심었다는 나무라고 하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공묘 · 공부 · 공림을 둘러보고 점심을 먹은 뒤에는 우리가 처음 도착했던 지난으로 다시 이동할 차례이다. 그런데 이때 약간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궐리빈사호텔의 지배인이 우리 일행이 묵은 객실의 TV가 파손되었다며 배상을 요구하며 버스의 출발을 막았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의 인격을 신뢰한 김학봉 가이드가 그럴 리가 없다며 언쟁을 계속하는 가운데 시간을 자꾸만 흘러가니, 차 속에 갇힌 일행들에게도 불평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상황이 이에 이르러서는 지켜보던 내가 나설 수밖에 없지 않는가. 가이드와 함께 지배인이 주장하는 객실 호수를 물으니 놀랍게도 나와 김 교수가 묵은 방을 지목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집히는게 있었다.

 

김 교수가 아침 일찍 대성전에 가서 읽을 축문을 쓴다면서 자기 집에서 가져 온 조그마한 전구를 TV브라운관에 걸고 축문을 쓸 때 ‘퍽’하고 터지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뜨거워진 전구가 브라운관에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그게 문제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김 교수는 자기가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우겨대고 참으로 난감하였다. 결국 호텔 측에서 ‘공안(公安)을 부르겠다.’고까지 하니 이럴 때는 이실직고 하고, 요구하는 데로 배상하고 떠나는 수밖에 없지 않는가.

 

결국 지배인, 가이드, 내가 현장을 답사하고 우리 측이 2,500 위안을 배상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즐겁고 유익했던 여정에서 옥에 티가 발생한 셈이지만 무더위 속에 2시간여를 끝까지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준 일행이 고마울 뿐이었다.

 

​* 이 글은 오수열 교수의 네이버 블로그에서도 볼 수도 있습니다 

 

 

 

▲ 오수열 학장    

[오수열 교수 프로필]

조선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타이완국립정치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중국인민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를 취득했다조선대학교에서 사회과학대학장기획실장정책대학원장 등을 역임한 후 정년 퇴임하였으며 현재는 조선대학교 명예교수와 광주유학대학 학장, ()21세기남도포럼 이사장한국동북아학회 이사장 등을 맡아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필자의 다른기사메일로 보내기인쇄하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위드타임즈

‘위대한 가이드’ 신현준X고규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