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혈질 선배(28회)
오수열(조선대 명예교수 · 한국동북아학회 이사장)
위드타임즈 기사입력  2023/11/28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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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라면 남 다닌 만큼 다녔으니, 선후배가 적을 수 없다. 그냥 그냥 이름 석 자나 기억하는 선․후배가 있는가 하면 사흘이 멀다않게 통화하는 선후배가 있다.

후배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선배 가운데 한 분의 사는 모습을 써볼까 한다. 이 분은 나보다 같은 학과(學科)의 10여년 선배이니, 연세가 벌써 고희를 지냈건만 지금도 그 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20대 청년의 정열이 무색하리만큼 패기만만함이 느껴진다.

무슨 일이 있을라치면 새벽이고, 늦은 밤도 상관없이 전화가 걸려온다. 어디 그뿐인가. 한번 걸려온 전화는 보통이 20분 정도이고, 길 때는 30분을 넘기기도 하여 전화기를 들고 있는 팔이 저려올 때가 없지 않다. 그만한 연세이면 입심(口力)이 떨어질 법도하련만 지금도 정열이 펄펄 넘친다.

​그러다 보니, 연세에 걸맞지 않게 때로 대화중에 ‘X팔’, 'X새끼' 등 육두문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하여튼 대단한 분이다. 어제도 학내의 일로 전화가 걸려왔다. 대학의 행사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지 분기충천하여 속사포처럼 질책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더욱이 사흘 전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으로 해병대 장병 2명과 민간인 2명이 사망하고 주민 대부분이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한 상황에 분노가 치솟았던지 학내 이야기는 어디로 가고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대북유화정책과 이명박 정부의 대처능력 부족이 안줏감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학내에 대한 비판이 정치인들에 대한 혹평으로 종횡무진 하는데, 밀린 일을 처리해야 하는 나로서는 “언제쯤 해방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밀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의 이러한 바람과는 딴판으로 전화기 속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예의 ‘X팔 새끼들'이 튀어 나오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한 20분간은 꼼짝없이 전화통 앞에서 벌을 서야할 상황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오전에 처리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 짓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될 판이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하늘같은 선배에게 불경(不敬)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중간에 선배의 말을 중단시키는 비상대책을 강구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는 것이다. 속사포처럼 쏘아내는 말도 언젠가는 멈출 때가 있는 법….

적당한 시점에 나는 얼른 “형님, 말씀은 백번 지당하신 말씀인데, 나이 지긋하신 분께서 ‘X팔 새끼' 등 육자문자를 쓰는 것은 아무래도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했더니 그 선배 말씀 왈(曰) “야 이 사람아, 내가 자네한테나 ‘X팔 새끼,  X같은 놈'하지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겠는가?”라며 다시 말을 이어갈 태세이니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여기에서 다시 말씀이 이어진다면 나는 영락없이 반나절은 시달려야 할 판인 것이다.

그런데 궁측통(窮則通)이라 했던가. 말씀을 중단시키지 못해 고심하고 있던 차에 누군가 나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으니 다름 아닌 연구실 문을 두드리는 내방객이 있었던 것이다.

“형님, 손님이 오셨으니 다음에 전화 드리겠습니다.”라는 말로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손님이 가시고난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 가운데 한 분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생각해보시라. 이 바쁜 세상에 자기에게 이득이 없는 일에는 쥐뿔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게 오늘의 세태(世態)가 아닌가 말이다. 그럼에도 그 선배는 자기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없는 일에도 비싼 통화료 들여가며 끈떡하면 전화 거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조금만 마음에 차지 않으면  ‘X팔 새끼'를 서슴지 않으니 요즘 세상 사람은 아닌 것이다.

내가 이 나이 먹는 동안 사람 사귀면서 터득한 진리(眞理)가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다혈질(多血質)인 사람이 비교적 정직하다는 것과 밖으로 영국신사인 것처럼 온유한 사람이 대개는 음흉하다는 것이다. 내가 시(時)도 때(所)도 없는 전화에 시달리면서도 그 다혈질 선배를 싫어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2013년 작)

 

 

▲오수열 교수 © 위드타임즈

[오수열 교수 프로필]

조선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타이완국립정치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중국인민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를 취득했다.  

조선대에서 법인사무국장, 사회과학연구원장, 사회과학대학장, 기획실장, 정책대학원장, 신용협동조합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정년퇴임하였으며, 민주평통상임위원, 성균관 자문위원, 광주유학대학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조선대학교 명예교수와 한국 동북아학회 이사장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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