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랜만에, 무려 반세기가 넘어 대학시절 활동했던 서클후배들을 만나 옛정을 되살리며 지내게 되었으니 이것도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나의 학창시절, 그 당시 조선대학교에서 유네스코학생회(KUSA)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던 서클이 국제연합학생회(UNSA)였는데, 이 서클의 지도교수가 정치외교학과의 최성준 교수님이셨던 관계로 자연스레 나도 여기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당시만 하여도 서클활동이 매우 활발했던 때여서 매주 1회씩 미국문화원(USIS)의 방을 빌려 국제정세 및 시사문제를 두고 토론도 하였고, 어떤 때는 미국문화원에서 주최하는 학생토론회에도 참석하여 우수학생으로 뽑혀 상품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내가 1977년 전임강사가 되어 교단에 서게 되자 최성준 교수님께서 “이제 자네가 선배이기도 하니, 지도교수를 맡는게 좋겠다.”시며 지도교수직을 나에게 넘김으로써 자연스레 지도교수가 되었다.
그때만 하여도 서클활동의 백미(白眉)는 단연 ‘여름철 농촌봉사활동’이었다. 1978년 여름 구례군 산동면 산골마을로 학생 30여명과 함께 봉사활동을 갔을 때, 73학번으로 체육과 학생이던 엄기준이가 현역장교의 신분으로 군복을 입고 후배들을 찾아왔다. 그 시절은 그만큼 선후배간에 정(情)과 의리가 넘쳐나던 때이다.
그후 기준이는 의무복무 기간만 채우고 중위로 전역해 체육 교사로 근무하다가 퇴임한 후 지금은 천하의 강태공(姜太公)이 되어 캠핑카를 몰고 전국의 유명 저수지를 숙박처로 삼고 있다고 한다.
내가 1982년 대학에서 해직되면서 이 서클과의 연락도 자연스럽게 끊기게 되었는데, 그 이후에도 그 당시 함께 활동했던 학생들은 이른바 「70-80 UNSA」라고 하여 20여명 이 서로 연락을 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일 년에 한번씩 모임을 갖기도 했던 모양이다.
작년 여름 우연히 “저희들 모임에 교수님께서 나오셔서 좋은 말씀도 들려주시고 함께 하시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
대학에서 정년퇴임한지도 몇 년이 흘러,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옛 후배들의 청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어떻든 약속된 장소에 나가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참으로 반가운 모습들을 만나게 되었다. 우선 학창시절부터 유달리 나를 따르던 물리학과 안성기는 젊었을 때 중국에서 하던 사업을 접고, 지금은 좋아하는 막걸리를 벗 삼아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고 있다며 반가워했다.
그런데 썼던 모자를 벗으며 인사하는 노인네 한 사람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다소 어리둥절 하자, “아이고 교수님, 제가 구례에서 농촌봉사활동 때 군복입고 찾아가 교수님과 한방 썼던 엄기준입니다.”라며 자기 소개를 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벗은 모자 속으로 반달 같은 대머리가 빛나고 있고, 얼굴에는 세월의 연륜이 잔뜩 내려 앉아 있었으니 내가 어찌 기억할 수 있었겠는가?
어떻든 이후 광주에서 사는 사람들 칠팔명이 두서너 달에 한번씩 모여 점심을 먹게 되었고, 나도 가능하면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만나는 기회가 잦아 가면서도 71학번 안성기처럼 학창시절 나를 따랐던 후배는 여전히 ‘형님’이라며 스스럼없이 다가왔지만, 73학번 기준이처럼 연령대가 다소 벌어진 후배들은 여전히 ‘교수님’이 라는 호칭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어려워하였다.
함께 늙어가는 처지에 이래서야 되겠는가! 부담 갖지 말고 스스럼없이 대하라는 나의 제의에 따라 지금은 ‘왕형님’이라는 호칭으로 통하게 되었다.
두어달 전에는 공대 전기과 출신으로 오랫동안 한전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는 74학번 최성주가 점심을 초대했고, 지난주에는 체육과 출신으로 고등학교 교장에서 정년퇴직했다는 75학번 박래홍이가 담양 수북면의 자기 집으로 초청해 점심을 함께 하였다.
서울에도 몇 명의 친구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곳에는 당시 여자대학에 다녔던 후배들도 있어서 가끔 함께 차도 마시며 우의를 다지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좋은 일이다.
다음 달에는 광주·서울 등 경향각지의 선후배들이 담양의 래홍이 집에서 모이기로 했다며, 벌써부터 준비에 들떠있는 기준이의 모습을 볼 때마다 학창시절이 파노라마처럼 뇌리에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