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아름다운 궁궐 '창경궁'의 참 모습을 보다
한상진 기자 기사입력  2024/01/2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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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 입구 안내  © 한상진 기자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세 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 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세종 즉위년 1418년,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후원)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 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했다.

성종대 창건된 창경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과 순조 30년(1830)대 화재로 인하여 내전이 소실되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 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 왕궁 법전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명정전은 국보 1호이고, 홍화문 등 보물 7점으로 지정 되어 있고, 대온실은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전각 관람은 언제나 예매 관람이 가능하나 후원 관람은 인터넷 예약 관람이 가능하다.

창경궁은 인조 때와 순조 때에 큰 화재가 있었다. 이후 조선 왕조가 기울고 순종(조선) 즉위 후 급속히 변형돼 일제 강점기에 결정적으로 훼손됐다. 1909년 일제가 강제로 창경궁 내부 궁문, 담장, 전각들을 헐고, 일본식 건물을 세워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드는 등 유원지로 조성했다.

권농장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춘당지라 불렀으며 정자를 짓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바꿨다. 그 뒤쪽에는 식물관을 짓고, 동쪽에는 배량당을 지었으며, 통명전 뒤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다. 또한, 일제는 남아있는 건물들도 개조하여 박물관의 진열실로 만들었다.

1911년에는 자경 전터에 2층 규모의 박물관을 세우고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시켰으며, 1915년에는 문정전 남서쪽 언덕 위에 장서각을 건립하고, 1922년에는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벚꽃 숲을 만드는가 하면 1924년부터 밤 벚꽃 놀이를 열었다.

일제가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끊어 도로 계획까지 했으나(현 율곡로), 종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 순종이 반대해 건설이 미뤄져 순종 사망 후인 1932년에 도로가 났다. 이것이 바로 율곡 터널이다.

1981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을 결정하면서 원형을 되찾기 시작했다.


1983년 12월 일반인의 출입 및 관람을 중단하고 일제가 뿌려 놓은 잔재들과 일본식 건물 및 정원 등을 모두 없애고 역사 사료에 따라 당시 존재해 있었던 전각과 편전 들을 복원한 끝에 1986년 다시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창경궁 관람 시간은 2월~5월, 9월~10월은 09:00~18:00 시. 6월~8월은 09:00~ 18:30분이며, 11월~1월은 09:00~17:30 (입장 마감 1시간 전) 휴관 일은 매주 월요일이다. 창경궁과 창덕궁(후원) 연계 관람할 수 있나 후원은 사전 예약과 별도의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창덕궁(후원) 입구는 창경궁 경내 함양문에 위치하고 있다.

 

 

▲ 창경궁 홍화문  © 한상진 기자

 

 

▲ 창경궁 명정문  © 한상진 기자



▲ 창경궁 함인정     ©한상진 기자

 

 

▲ 창경궁 환경전  © 한상진 기자



▲ 창경궁 교화문  © 한상진 기자



▲ 창경궁 인정문  © 한상진 기자 



▲ 창경궁 인정전(왕의 즉위식이나 외국 사신 접견 등 나라의 공식 행사를 치르던 곳)  © 한상진 기자



▲ 창경궁 해시계(앙부일구)  © 한상진 기자



▲ 경복궁 문정전  © 한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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