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봄날의 자유로움(34회)
오수열(조선대학교 명예교수·광주유학대학 학장)
위드타임즈 기사입력  2024/03/04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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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들을 대접하기 위해 차(茶)를 끓이고 있을 것이다[본문 중에서 }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春分)이다. 평소 같으면 토요일 이 시간쯤이면 아내와 함께 약사암 근처에 이르렀을 터인데, 오늘은 모처럼 침대에 널부러저 뒤척이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대전 계룡대의 공군부대에 근무하는 박사과정 제자들이 토요일인 오늘 짬을 내 수업을 받겠다며 오후에 연구실로 오겠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이곳 광주기지에 근무할 때 박사과정에 입학했지만, 인사발령에 의해 계룡대로 전출된 까닭에 평일 수업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모처럼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할 터인데도 공부를 위해 기꺼이 휴일을 포기하겠다는 그들이 기특할 뿐이다.

약사암 일정이 취소된 것을 알고 행암동엘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서는 아내 뒤에 남겨진 집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냉장고를 뒤져 먹을거리를 찾아보지만, 쉽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다.

 

당뇨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나를 경계해 달착지근한 것은 모두 치워 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윌 하나로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이번 학기는 나에게 두 가지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안겨 주고 있다. 첫째는 내가 6.25 나던 해 3월에 태어났으니 아마 정상적이라면 8월 말에 정년을 해야 할 터이고 그렇다면 40년 대학생활을 끝내야 할 마지막 학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며칠 전 조대부고 야간 동기생들로만 구성된 무등회(無等會) 모임에 나갔을 때의 일이다. 모두 다 60대 중반을 넘은 나이니 자영업을 하는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현직에 남아있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불분가지이다.

 

먼저 도착해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던 친구들이 어서 오라면 자리를 권한다. 그 가운데 독일어과 교수를 하다 2년 전 퇴직 한 친구가 “어! 수열이, 자네는 몇 년 남았는가?”며 묻는다.

 

내가 겸연쩍게 ‘그래 한 3년 남았네’라고 대답하자 그의 대답이 걸쭉하다. “저런 새까만 후배하고 학교를 같이 다녔당께.” 어떻든 나는 출생신고를 늦추어 주신 선친(先親) 덕택에 앞으로도 3년을 더 강단에 머무를 수 있는 법률적 특권을 가지고 있다.

둘째는, 그동안 이런저런 보직(補職) 때문에 대학생활의 자유로움을 100 퍼센트 만끽하지 못했던 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느지막히 학장(學長)과 정책대학원장(政策大學院長)으로 이어진 4년 반의 보직을 거치면서 나름대로는 심리적 부담감이 없지 않았다. 이달 초 부총장 직을 둘러싼 우여곡절이 있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었겠지만, 전례(前例) 없이 이력서 등을 내라는 대학자치기구 철부지들의 요구가 있었다. 교수의 명예가 담보되지 않는 왜곡된 절차에 의해서는 보직을 맡지 않겠다고 털어버린 것은 얼마나 잘한 일인가.

오늘 이 따사로운 정오의 햇볕 속에서 마당에 핀 동백꽃을 들여다보는 자유로움을 만끽 할 수 있는 것도 대학행정으로부터 자유로워졌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조금 있으면 외출한 아내가 점심을 챙겨주려 집에 들어설 것이다. 그리고는 “가는 길에 학교까지 태워다 주겠다.”던 김교수의 차가 골목에 도착할 것이다. 같이 나이 들어가는 데도 변함없이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그가 고마울 따름이다.

 

그리고 연구실에 도착한 나는 먼 길을 달려온 제자들을 대접하기 위해 차(茶)를 끓이고 있을 것이다.

도로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골목길 단독주택의 한가로움 속에 나의 영혼은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다.[2015년 작]  

 

 

본문이미지▲오수열 교수 © 위드타임즈

[오수열 교수 프로필]

조선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타이완국립정치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중국인민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를 취득했다.  

조선대에서 법인사무국장, 사회과학연구원장, 사회과학대학장, 기획실장, 정책대학원장, 신용협동조합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정년퇴임하였으며, 민주평통상임위원, 성균관 자문위원, 광주유학대학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조선대학교 명예교수와 한국 동북아학회 이사장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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