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암산성(笠岩山城)등행기(46회)
전남과 전북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 입암산성' 여행기 / 오수열 교수
위드타임즈 기사입력  2021/12/21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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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기다려지는 날이 있다. 매월 둘째 토요일이다. 8년 전 건강문제로 혹독한 경험을 한 이후 가까운 사람들과 만든 「남도요산회」의 산행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말이 등산회이지, 십수년간 모임을 함께해온 남도포럼 회원들만으로 조직된 거의 가족모임 비슷한 산행이다. 그러다 보니 여느 산악회처럼 대형버스를 전세 내어 가는 것도 아니다. 창립 이래 지금까지 책임을 맡아 봉사하고 있는 조규봉 회장의 어린이집 소형버스에 15명 내외의 회원이 몸을 싣는 것으로 우리의 산행은 시작된다.

 

​이번(2014. 06) 산행지는 조규봉 회장이 제안한 대로 장성의 입암산성(笠岩山城)으로 정하여졌다. 장소 결정은 회장과 산행대장이 상의하여 결정하지만, 나를 포함하여 회원 가운데 상당수가 60대임을 고려하여 그다지 험준하지 않은 곳으로 선정하고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

 

​고속버스로 서울 등지를 오갈 때면 장성을 지나 정읍에 접어드는 곳 오른쪽에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진 깍아 지른 산세(山勢)가 나타나는 데 그곳 너머에 입암산성이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고, 언젠가 한번 가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마침 날씨는 구름에 끼어 산행에 안성맞춤이었다. 버스가 우리일행을 내려준 곳은 장성군 북하면 전남대학교 실습림이 있는 남창계곡이었다. 우거진 숲과 시원한 계곡물로 7~8월 무더위에 광주 인근의 피서객들이 몰리는 곳이다. 특히 그다지 멀지 않는 곳에 천년고찰인 백양사(白羊寺)가 자리하고 있어 두 곳을 함께 둘러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장성, 정읍, 고창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갓바위에서 [ 사진 제공= 오수열]

 

 

입암산성의 등행코스는 일단 은선동 삼거리 까지 가서 그곳에서 좌,우로 나뉘어진다. 좌측코스는 출발지점에서 줄곧 쉬지 않고 ‘갓바위’까지 올라 북문을 거쳐 남문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대략 5시간 쯤 걸린다고 하는데, 산세가 비교적 완만하여 나이든 사람들에게도 크게 무리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우측코스는 성(城)의 흔적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는 남문(南門)을 거쳐 입암산성 습지보호구역을 지나 북문에 이르는 것으로 북문에서 갓바위까지 오르는 길이 상당히 힘들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당연히 왼쪽코스를 택하되, 일단 갓바위까지만 가서 그 다음 여정을 결정하기로 하였다.

 

은선동 삼거리에서 갓바위까지의 길은 두어 곳 힘든 곳이 있기는 했지만 울창한 숲이 햇볕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어 산행을 하기에는 크게 무리가 없었다.

 

나 또한 어젯밤 숙면을 취하지 못해 속으로는 걱정했는데도 일행에 뒤쳐지지 않고 산을 탈 수 있었으니 다행한 일이었다.

 

우리가 목적했던 갓바위에 오른 때는 점심때가 지난 오후 1시 경이었다. 여러 산우(山友)들이 준비해온 과일과 초콜렛, 쑥떡 등으로 간간히 새참을 먹은 탓인지 허기를 호소하는 사람도 없었고, 모두들 바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정읍쪽의 평야와 그 너머로 보이는 고창, 부안의 경치에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역시 땀흘려 산을 오르는 까닭이 이런데 있지 않을까 싶다.

 

 

갓바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회원들 [사진 제공= 오수열]  

 

 

듣던 대로 갓바위에서 북문에 이르기까지의 길은 그 경사가 매우 심한 것이어서 만약 우리가 은선동 삼거리에서 북문을 거쳐 갓바위에 이르는 코스를 택했다면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입암산성 산행의 백미는 북문에서 남문까지의 하산(下山)하는 과정에서 맛볼 수 있었다. 즉 단순한 산행만이 아닌 우리 조상들의 호국정신과 민초(民草)들의 고달펏을 삶의 흔적을 곳곳에서 느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입암산성의 북문에 [ 사진 제공= 오수열]    

 

 

입암산성은 삼한시대(三韓時代) 처음 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침략에 항거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하는 데, 내가 보기에는 그 위치로 보아 부안, 고창, 정읍 등지에 자주 침입했던 왜구로 부터 내륙을 방어하는 데 주목적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 보였다. 즉 해안을 통해 침입해 온 왜구로부터 내륙지방을 방어하는데 매우 유용한 지리적 이점을 갖춘 곳이 이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추측은 내려오면서 확인되었다. 정유재란 당시 의병장 윤진이 의병(義兵) 100여명으로 왜적과 싸우다 순절했음을 기록한 비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성(城)의 규모는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내에는 거주하는 민관(民官)을 위한 저수보와 식수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뿐만 아니라 고문헌에 의하면 성내에는 인근 고을의 수령과 장령들이 머무르는 장성영, 담양영, 정읍영, 고창영, 부안영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입암산성이 유사시 인근 고을 수령과 관속들의 피난처로서의 기능을 수행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조선조시대의 신분제사회의 성격에 비추어, 서해안으로부터 왜적이 침입할 때 인근 고을의 방어는 주로 평민(平民)들에게 맡겨졌을 것이고 수령과 관속들의 가족들이 주로 이곳 산성으로 피신하여 안일을 도모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하산 하면서 보니 성내 이곳저곳에 당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맷돌과 학똑 등이 거의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었고, 안내판에는 일제시대까지 이곳에서 거주하던 주민들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전시되고 있었다.

 

어디 일제시대 뿐이었을까. 이곳의 위치로 보아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도 주민들이 거주했을 가능성이 높고, 심지어는 6.25전쟁 시에도 빨치산들의 은신처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사진으로 보아서는 상당한 숫자의 산촌민(山村民)들이 이곳에 거주하며 삶을 영위했을 것으로 보였다.

 

실제 나는 어렸을 적 선친으로부터 여러 차례 백양사 근처의 빨치산 토벌을 위한 이른바 ‘죽창부대(竹槍部隊)’에 동원되어 고생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당시 장성지역 빨치산의 주요 활동무대가 북상면(北上面)과 북하면(北下面)일대였음을 고려할 때, 선친이 죽창부대의 일원으로 고생하셨던 지역이 이곳이었거나, 이곳과 그다지 멀지 않는 곳이었을 것이다.

 

선친이 죽창 하나들고 경찰에 이끌려 생사(生死)를 넘나들었을 곳을 지금 나는 고급 등산가방을 들러메고 호사스럽게 답사하고 있는 것이다.

 

 

오디를 줍고 있는 회원들 [사진 제공= 오수열] 

  

 

이번 산행의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습지보호구역 인근에 자생하고 있는 오디를 따먹는 것이었다. 마침 요즈음이 오디철 이어서인지 길가 이곳저곳의 뽕나무에 오디가 주렁주렁 달려있었고, 특히 이곳이 오염과는 거리가 먼 곳이어서 우리의 구미(口味)를 더욱 당겼다. 우리 일행은 그것을 따먹는 재미에 흠뻑 빠졌던 것이다.

 

특히 오디가 당뇨에 좋다면서 유병자(有病者)인 필자와 신성수 회원을 위해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조규봉 회장과 부지런히 주워 모은 여성 회원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점심시간이 꽤나 지났음에도 그 누구도 ‘밥먹자’는 재촉 하나 없었을 만큼 즐거운 산행을 마치고 우리 모두는 광주로 향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 이 글은 오수열 교수의 네이버 블로그에서도 볼 수도 있습니다. 

 

 

 

 

▲ 오수열 학장    

이 글을 쓴 오수열 교수는 조선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타이완국립정치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중국인민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를 취득했다조선대학교에서 사회과학대학장기획실장정책대학원장 등을 역임한 후 정년 퇴임하였으며 현재는 조선대학교 명예교수와 광주유학대학 학장, ()21세기남도포럼 이사장한국동북아학회 이사장 등을 맡아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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